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남독군 교체 파동 (문단 편집) === 우광신 임명안 부결 === 이러한 강력한 반대 운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1920년 2월 26일, 국무회의는 하남독군에 우광신을, 성장에 왕인천을 임명하는 것을 의결하고 대총통 쉬스창에게 승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쉬스창은 왕인천의 성장 임명만을 승인하고 우광신의 임명안은 재가하지 않았다. 이는 쉬스창 자신이 하남 출신이며 직예군벌이 자오티를 지원하며 전쟁까지 불사할 수 있다고 강경하게 반발하는 상황에서 환계의 주장만 받아들여 내전을 야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쉬스창은 다음과 같은 의사를 표명했다. >"내가 총통으로서가 아니라 하남인의 자격으로서 결코 하남 지방에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할 텐데, 이번 독군교체는 반동을 촉발시키므로 나는 절대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돤치루이는 화가 나 국무총리 [[진윈펑]]에게 "당신이 이렇게 쓸모가 없는데 어떻게 총리 노릇을 할수 있겠는가?"라고 마구 면박을 주었다. 차오쿤도 진위펑을 찾아가 경고했다. >"자오티를 제거하고 우광신을 등용하는 것은 북양군벌의 해체를 의미하므로 절대 실행할 수 없소." 돤치루이와 쉬스창, 차오쿤 사이에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진위펑은 2월 27일 국무총리에서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쉬스창의 만류로 2월 29일 사직이 철회되었다. 하지만 우광신 임명안을 가결시키지 못한 우광신에 대한 안복구락부의 불만이 거세지면서 이후 안휘군벌과 안복계는 남방정부와 화의를 주도하던 왕읍당을 귀환시키고 주수모를 새로운 국무총리로 추천하며 진위펑 내각을 흔들게 되었다. 3월 3일에는 안복계 삼총장인 재정총장, 교통총장, 사법총장이 국무회의 출석을 거부하고 3월 4일 사표를 제출하여 진위펑 내각 붕괴를 유도했다. [[차오쿤]], [[장쭤린]] 등이 내각 유지를 위해 뛰어다니고 쉬스창이 내각 유지를 주장하면서 3월 16일 돤치루이가 안복계 3총장의 사직을 취소하게 하고 3총장은 다시 국무회의에 출석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